불교와 글쓰기

10월 9일 불교 수업 후기

작성자
배현숙
작성일
2017-10-12 21:51
조회
2698
이번 수업에서는 四諦, 八正道를 비롯하여 12연기와 윤회, 그리고 自我의 형성과 無我 등 너무 깊고 감당키 어려운 개념들이 한꺼번에 봇물처럼 쏟아진 탓에 여적 갈무리도 못하고 허우적대고 있습니다. 하는 수 없지요. 간신히 주워 담은 四諦에 대해서만 깜냥대로 간추려볼 밖에요.

四諦 - 깨달아야 한다!

四諦, 八正道는 초기 불교 경전에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는 개념들이지요. 이번 수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이 법이 ‘깨달음’의 법이라는 점이었지요. 四諦의 ‘諦’는 'satya', ‘깨달음’이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그게 무어 그리 새삼스러우냐 하시겠지만, 저는 붓다께서 이것을 ‘깨달으셨다’는 말씀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거든요. 붓다께서 출가하신 후 오랜 세월 고행과 명상, 수행을 통해 ‘깨달으신’ 내용이 바로 사성제, 팔정도지요. ‘苦, 集, 滅, 道.’ ‘이것이 苦다, 이것이 苦의 발생이다, 이것이 苦의 滅이다, 이것이 고의 滅로 가는 길(道)이다.’ 저는 사성제를 여러 번 반복하여 듣고 읽으면서도 ‘이것이 苦다’라는 것이 왜 깨달아야만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苦’는 원치 않아도 그냥 느끼는 것이고, 의도치 않게 다가와도 그냥 겪는 일인데, 왜 그것이 굳이 깨달음이어야 하는지,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붓다께서 깨달으셨다는 ‘苦’는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그런 苦가 아니라고 합니다. ‘이 세계가 苦’(一切皆苦)라는 거지요. 그거야 우리도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것 아닙니까? 사는 게 다 괴로움이고 번뇌다! 자주 입에 올리며 당연하게 지껄이고 ‘받아들인’ 말이지요. 사는 일은 어차피 괴로운 일인데, 붓다께서는 그것을 굳이 ‘깨달으셨다’고 하니 그게 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삶의 조건이 ‘苦’다!

그런데 붓다께서 깨달으신 ‘苦’란 보다 근원적인 것이었지요. 말하자면 그 苦는 우리 삶의 도처에서 다가오는 그런 괴로움이 아니라 ‘실존의 조건’에 대한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인간은 生老病死를 겪지 않을 수 없는 고통스런 존재라는 사실, 살아 있는 동안에도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고통,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고통, 한없이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어 안타까운 고통, 그리고 색,수,상,행,식의 五蘊에 집착하는 고통, 인생에는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이런 고통들이 이미 내재해 있다는 걸 깨달으셨다는 말이지요. 붓다께서 깨달으신 苦는 우리 삶에 이미 그렇게 ‘주어진 것’으로서의 괴로움이었어요. 그런데 왜 저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이 세상 만물 중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붓다께서 이 세계, 사람살이의 조건이 괴로움이라는 것을 깨달으셨다는 말씀은, 우리의 삶의 조건이 어떻게 구성되어있는 것인지를 지혜로써 깊이 통찰하셨다는 뜻이겠지요. 그 통찰을 통해 깨달으신 내용은 인생의 본질이 ‘덧없음’, 즉 변화라는 사실이었습니다. ‘諸行無常’.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항상적인 것이 없으며, 영원한 것도 없고,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 말하자면 인간을 비롯해서 모든 형상, 감각, 지각, 감정까지, 모든 존재는 여러 가지 인연조건- 원인이나 조건에 의해 생겨난 것이고, 그것들이 변하면 존재 역시 변하거나 사라진다는 것을 깨닫고 수용하셨다는 뜻입니다. 이 ‘緣起’의 법칙이 인간 뿐 아니라 모든 물질, 전 세계, 전 우주에 적용됨을 깨달으셨다는 것이지요. ‘이 세상 만물 중에 고정불변하고 실체적인 것은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상대적이고 의존적이다!’(호진 지음, 무아 윤회 문제의 연구,109)

스피노자가 말한 ‘양태’라는 개념이 생각납니다. ‘다른 것 안에 있고 다른 것에 의해 존재하는 실체의 속성의 변용들.’ 세상 만물은 스피노자의 용어로 말하면 모두 양태이지요. 그의 말에 의하면 인간은 다른 것에 의해 존재할 수밖에 없는 ‘변용들’이구요. ‘변용’이라는 말은 변화의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생성’이라는 말이지요. 생성이란 없던 것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변화’ 그 자체를 말합니다. 직전의 상태가 사라져 다른 상태로 가는 것, 이것이 생성이지요. 생겨남이란, 태어남이란 그러니까 죽음인 것이고, 없어지고 사라진다는 것은 또 다른 태어남, 생겨남이지요. 말하자면 삶과 죽음의 동시적 과정이 생성입니다. 그것은 변화이니, 거기에는 당연히 고정된 어떤 ‘있음=존재’라고 불릴 만한 것이 없겠지요. ‘주체’나 ‘자아’라는 것은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이 변화의 결과를 일컫는 말일 뿐이지요. 붓다께서 깨달으신 것이 ‘諸行이 無常’이고 ‘諸法이 無我’라는 사실이었습니다.

無常, 그 두려움과 불안

그런데 붓다께서 깨달으신 그 진리를 우리는 왜 당연하게 여겼을까요? 우리는 이 ‘덧없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받아들이지 못할 뿐 아니라 매순간 어떻게든 희망을 지어내며 분발하는 노력으로 끊임없이 무상을 부정하려고 했기 때문이겠지요. 그것을 우리는 ‘생활’이라고 부르며 열심히 노력하고 한 순간도 포기하지 않고 희망고문을 합니다. ‘인생은 고통스럽게 생겼다’는 걸 안간힘으로 외면하는 노력을 삶이라고 여기면서요. 그런데 붓다는 인생은 고통이라는 걸 온몸을 내던져 기어코 깨달았습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태어난 존재로서 어차피 늙어 앓다가 죽지 않을 수 없는 존재다!’ 붓다께서 깨달으신 이 진리를 우리는 가급적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하며 매 순간 얼마나 스스로를 격려하고 긍정적인 단언까지 하며 살고 있나요. 그 뿐인가요? 무상을 뒤엎을 숱한 환상까지 만들어내느라 정말 바쁩니다. 되도록 불안하고 불쾌한 것들로부터 멀리 달아나, 재빠르게 기분을 전환하느라 별별 노력을 다 하지 않습니까? 그 암울한 무상을 곱씹느니 차라리 그 시간에 먼 훗날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편이 현명하다며 스스로 부추기고 달래느라 열심이지요. 매번 근사한 목표를 세워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매순간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어코 외면하는 것이지요. 이 모든 것이 바로 집착일 거에요. 무상을 부정하는 행위지요. 이 집착은 아마도 무상, 덧없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때문에 생겨난 것일 겁니다. 마르크 에셍이 <붓다의 심리학>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굴욕’, ‘수치심’으로부터 되도록 피하고 싶어”서, “우리 자신의 이미지 안에서 자신을 유지하려는 헛된 투쟁을 하고 있다”고 말한 바로 그 삶을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지요. 붓다와 아주 다른 선택을 한 우리는 그래서 무명 속에서 미혹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지금 이 순간도 끝없는 윤회를 반복하는 것이겠지요. 이 어리석음은 급기야 ‘누군가에게 어떻게든지 의지해서라도, ‘나’를 분명하게 확인하고 싶어 하고, 애인과 자식과 남편, 친구들과 이웃에 대해 온 마음을 다해 사랑과 친애의 감정을 내보이며 결국은 자신을 확인하고 자신에게 애착합니다. 그 뿐인가요? 돈이나 명예, 권력, 공부 같은 것에라도 의지하여 ‘나’를 끝없이 확인하고 싶어 하지요. 인간은 신이 아니라서 자기 안에 스스로 원인을 갖는 완전하고 충만한 존재가 될 수 없으니, 다른 것들에 의지해서라도 충만함을 느끼려 안간힘을 쓰는 것이지요. 참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이 양태의 숙명! 양태인 우리는 매 순간 인연조건이 출렁일 때마다 나를 형성하고 있는 다른 것들에 의해 의도치 못한 변화무쌍함 속에 던져질 수밖에 없고, 나를 구성하는 숱한 타자들은 인과 연이 한번 출렁일 때마다 통째로 변하고 있으니, 참으로 ‘나’라고 할 만한 그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는데도, 이 변화와 무상함이 가져온 두려움과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우리는 무엇인가에 기어코 집착합니다. ‘왜 인생이 고통스럽게 되었는가?’를 탐구한 끝에 붓다께서 발견하신 진리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集諦’, 즉 ‘집착이야말로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것이지요. 변화와 무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고 ‘여기며’ 그것을 탐하는 것으로부터 괴로움이 생긴다고 붓다는 말씀하십니다. 이 집착이 어리석음이고 무명입지요. 이 세상의 법칙, 緣起를 알지 못하는 無明이 우리로 하여금 ‘我執’에 붙들리게 합니다. 그것은 있지도 않은 나를 있다고 여기며, 또 다른 것들을 있다고 여기지요.

덧없음을 도피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살아라

그러나 붓다께서는 우리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 무상을, 그 모든 변화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임으로써 괴로움을 없앨 수 있다고 깨달으셨습니다. 인간의 조건이 그러하다면,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여라! 그 모든 덧없음을 도피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살아라! 그것이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이다! 괴로움이 있으며, 그 괴로움을 발생시키는 원인은 무엇이냐를 깨닫는 것만으로는 진리가 완성될 수 없겠지요. 그것은 허무주의니까요. 괴로움이 있다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어야 완성된 진리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붓다께서는 괴로움을 있게 한 집착으로부터, ‘있다고 여기는’ 그것이 ‘없음=空’(一體皆空)을 깨달으신 것이지요. 이 세계엔 있다고 여길 만한 것이란 없다! 따라서 그것이 없다면 집착할 것이 없을 테고 그렇다면 괴로움도 없다! 그래서 붓다의 세 번째 깨달음이 바로 ‘괴로움의 사라짐’입니다. 있다고 여길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것이 바로 괴로움이 없는 상태라는 것을 깨달으신 것이지요. 사성제의 세 번 째 진리인 ‘이것이 苦의 滅이다’라는 깨달음을 통하여 붓다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열반을 얻을 수 있었다. 고통이 완전히 없어진 상태를 깨달았다.”

에셍도 <붓다의 심리학>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지요. “사성제는 이러한 취약성 자체를 출발점으로 해서 억압적이고 도망칠 수 없을 것 같은 삶의 굴욕에서 겸손을 길러준다.”그는 불교를 상당히 ‘낙관적’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붓다의 세 번 째, 네 번 째 깨달음의 진리가 있기 때문이겠지요.

마지막으로 붓다께서는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을 통하여 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방법까지를 깨달으셨습니다. 그것이 사성제의 네 번 째 깨달음에 해당하는 ‘고통을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는 방법’, 여덟 가지 올바른 길- ‘八正道’입니다. 붓다께서는 이 실천을 통하여 고통의 소멸,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괴로움이 사라진 상태를 至福, 열반이라고 합니다. 열반은 괴로움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에서 느끼는 고요함이지요. 붓다께서는 깨달으신 후 일주일 간 법열에 드셨다지요. 감히 짐작할 수조차 없는 그 깊은 고요함과 충만함, 그 온전함을 흐릿하게나마 상상해봅니다. ‘진짜로 살게 되었다’는 그 충만함, 이 생에서 저는 과연 붓다께서 지니셨던 그 생명력을 겨자씨만큼이라도 느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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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0-13 15:53
    겨자씨만큼이라도 느끼겠다는 그 욕망에서 시작되는 것이 발심인가 싶기도 해요. 이번 주 유독 후기들이 멋지네요. 덕분에 저같은 중생의 마음에도 욕망의 불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