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12.12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6-12-06 14:23
조회
3470
12월 12일(..응?)부터는 본격적으로 글쓰기 모드에 돌입합니다. 일단 15경 읽고 공통과제는 해오시고요, 그밖에도 준비할 게 있지요.
일정 공유한대로 19일에는 1품에서 경 하나를 택해 씨앗문장을 고르고 이를 중심으로 경전을 해석하는 글을 써오시고요.  26일에는 전체 에세이를 쓰기로 했지요.
하여 다음주 12일에는 공통과제 외에도 이 두 개의 글쓰기에 대한 대략적 개요랄까 프로포절을 준비해오셔야 합니다. 어떤 경전을 택할 것인지, 이를 어떤 주제로 풀어낼 것인지 등 최대한 구체적으로 잡아오시는 만큼 공유하면서 도움말도 많이 얻을 수 있겠지요.
다음 주 간식은 은하쌤께서, 그리고 어제 수업 후기는 보리쌤께서 해주시는 걸로 ^^

어제는 또 3주만에 돌아온 수업 및 합평 시간이었죠. 보리쌤께서 잘 정리해주시겠지만, 몇 가지 생각나는 대로 정리해볼게요.
우선 글쓰기에 대한 두 개의 코멘트가 있었습니다.
하나, 매 경전에서 달리 등장하는 수행자들의 질문 및 그에 대한 붓다의 대답에 집중할 것. 1품 전체가 계정혜의 논의인 것 우리 모두 다 알고, 불교에 대해 글쓸 때 결국 연기와 공을 이야기하게 된다는 것도 다 알지요. 알지만, 채운 쌤 말씀대로 붓다 설법의 특징은 질문자가 어떤 조건에 놓여 있고 어떤 단어들을 사용해 질문하는지를 놓치지 않고 그에 걸맞게 깨달음을 전한다는 데 있습니다. 결론이 연기이고 깨달음이고 잘 보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길이 있지요. 그걸 놓쳐버리면 매번 같은 말만 반복할 뿐 도무지 글쓰기에 변화가 있을 수 없다는 점, 주의하셔야 합니다.
둘, 경전의 핵심을 짚고 이를 문제화할 것. 글을 쓸 때 흔히 일이나는 일이, 자신의 개인적 관심사에 매몰돼 전체를 놓치고 곁가지를 붙들다 끝나는 거죠. 이럴 경우 어떤 책을 공부하고 경전을 읽어도 그것이 전하는 바를 다 자기 일로 환원해버리기 일쑤가 됩니다. 전체를 파악하면서 그 안에서 자기 생각을 문제화하는 것과, 경전을 소재 창고로 사용해 자기 일을 말하기 위해 일화나 인물을 끌어오는 것은 아주 다르다는 것, 잊지 맙시다.

셋, 11경에 대한 채운 쌤의 인상적인 설명이 있었지요.
기억하시다시피 여기서 '기적'을 논하려는 께밧따에게 붓다는 그 대신 교계의 기적에 대해 가르칩니다.
사실 전 개인적으로 신통의 기적도 붓다 식으로 다시 해석하려면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가령 "장애 없이 담을 통과하고 서벽을 통과"하는 게 신통이라면 이는 깨달음에 이르러 전체와 더불어 자재할 수 있는 자의 능력이 맞는 것 같아서요. 이걸 물질로 이루어진 몸이 물질을 통과하는 차원의 물리적 흐름을 거스르는 일로 꼭 읽어내야 하는 건 아닐 것 같아요.
하지만 신통과 예지는 아무래도 여러 사람들의 오해를 사고 현혹시킬 수 있으니 위험하다면서 붓다는 교계의 기적을 진정한 기적으로 간주하지요.
이를 채운 쌤은, 기적이란 결코 비일상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일상에서 해야 할 일을 단 한 번도 어기지 않는 것, 이게 기적이라는 의미로 풀이해주셨습니다.
놀이에 빠지지 않고, 삿된 가르침에 빠지지 않고, 맛있고 풍족한 음식과 옷에 빠지지 않는 것은 일상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우리 같은 중생에게는 무엇보다 어렵고 익숙치 않은 일 중 하나지요. 대상에 현혹돼 나도 모르게 그것을 좇아가는 일이 우리네 일상이기도 하니까요.
하여 붓다는, 이 같은 수행을 묵묵히, 꾸준히 해내면서 정진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수행자가 행하는 매일의 기적이라고 설명하네요. 공부란 매일 매순간 기적을 행하는 일! >.<

넷, 12경에 대한 설명도 아주 재미있지요. 12경은 한 마디로 '깨달음과 자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타자가 타자에게 대체 뭘 해줄 수 있냐는 로힛짜, 그리고 그런 로힛짜 등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베씨카, 그리고 이 둘 모두를 만난 붓다의 이야기.
이 경전은 로힛짜의 저 질문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타자가 타자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
로힛짜는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바라문에게 해탈이란 극도의 고행과 금욕의 실천을 통해 얻는 것으로, 타인에게 전달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개체가 겪어낸 바가 중요한 것이지 메뉴얼이 있는 게 아니지요.
평민인 베씨카는 이를 악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 같은 수행의 독점에 뭔가 중요한 게 결여된 것 같으니까요.
그런데 로힛짜를 만난 붓다도 이렇게 말하는군요. 타자가 타자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맞다, 없다! 하지만, 기억하시죠? 채운 쌤의 설명에 의하면 동일한 선언 의미가 전자와 후자가 판이하게 달랐지요.
붓다가 들려준 '질책 받을 만한 세 스승' 이야기그 이를 잘 보여줍니다. 세 명의 스승이 질책받을 만했던 이유는 하나, 그들이 '너를 위해'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 깨달은 자는 단지 그 자신의 해탈에 머물지 않고 세계 안에 원만히 존재함으로써 모든 중생과의 구분이 사라진 자, 하여 그에게는 이미 모든 행에서 주체와 대상의 구분이 사라져버립니다.
내가 너를 위해 이것을 가르친다, 내가 민중을 위해 나를 희생한다, 이런 생각이 보살행과 아주 먼 거리에 있는 건 그 때문입니다.
채운 쌤 설명대로 보살이 행하는 자비란 보살이 곧 중생이므로 중생과 더불어 내가, 그러니까 우주로서의 내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행하는 모든 것이랍니다.
그러니 타자가 타자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없지만, 타자의 구분이 없다는 의미에서라면 그건 이미 모든 타자를 위해 언제나 살 수 있고 살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보살, 자비, 스승, 공부, 수행, 출가 등 1품에서 접한 이 엄청난 이야기들을 각자 녹여내는 것이 이번 학기 우리의 과제.
부디 끝까지 정진해 기적을 이루는 연말을 맞이하시길. 물론 저도 ㅎㅎ

다음 시간에는 15경 토론 및 채운쌤의 12연기 설명, 그리고 에세이 주제 공유 이어집니다. 지각 결석 사절합니다~ ㅋㅋ
다음 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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