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12월 5일 수업 후기

작성자
보리
작성일
2016-12-11 11:36
조회
3564
기다리던 채운쌤의 합평이 있었습니다. 그 동안의 글쓰기에 대한 평가가 있었습니다. 수경쌤이 12월 12일 세미나 공지에서 써주셨듯이, 글쓰기에서 주안점을 둬야할 점들을 짚어 주셨습니다. 각 경의 전체 내용을 파악하고 핵심을 써야 하며, 각 경마다 질문자의 질문 내용과 붓다의 답변 사이에서 드러나는 차이(틈)을 넣고 붓다의 해석을 써 줘야 나의 해석도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각 경 별로 수경쌤 글에 더해서 채운쌤의 해석과 제 생각도 더해 써 보았습니다.

10경 쑤바의 경

세존이 돌아가시고 세존의 가르침을 제자들은 어떻게 이해했나를 묻는 부분입니다. 계행의 구족과 선정의 성취와 보다 탁월한 여덟가지 앎의 완성을 통해 번뇌를 부숨에 관해 언급했습니다. “견성[見性] ”, “관[觀]”에서처럼 불교에서는 왜 ‘봄’을 이야기할까요? 본다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본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11경 께빳따의 경

신통과 예지는 사람들을 미혹해서 위험하므로 교계의 기적을 이야기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신통”에 꽂혀서 붓다가 아니라고 한 신통에 대해서 썼다고 질책(?)을 좀 받았습니다.-4경 쏘나단다의 경에서 바라문이 되는 조건에서 태생, 베다에 정통, 외모, 계행 중 굳이 아니라는 ‘외모’에 대해 썼다가 수경쌤께 한 소리 들었던 기억이 났습니다.-변명하자면, 쓸거리를 찾다가 그나마 몇 줄 끄적거릴 수 있다는 생각에 그만....ㅠ ㅠ

붓다는 이런 신통의 기적, 예지의 기적을 왜 곤혹해하고 싫어했을까요? 계.정.혜가 기적입니다. 일상에서 단 한 번도 어기지 않는 것이 기적일 수 있습니다. 붓다가 말하는 수행이 바로 기적입니다.

12경 로힛짜의 경

가르침과 배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인도 사회의 수행방식은 스승이 제자에게 가르치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개인이 개인에게 전수하는 것이었습니다. 붓다는 무리지어 다니면서 설법하였습니다. 바라문들과 달리 붓다의 집단이 생각하는 가르침을 추동하는 원인은 자비입니다. 자비를 위해 가르칩니다. 선종에서는 스승은 가르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전제를 깨는 것뿐입니다. “줄탁동시[啐啄同時-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새끼와 어미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으로, 선종(禪宗)의 공안(公案) 가운데 하나]”, 의도로 깨는 것이 아니고 “동시성”입니다. 스승과 제자는 인연조건에 맞아들어 존재가 존재에 스며드는 것입니다. 스승은 그냥 자기의 삶을 원만히 살아갑니다. 원만한 길을 걸어가는데 ‘자비심’으로 충만합니다.

13경 세가지 베다의 경

‘어떻게 범천에 태어날 수 있을까?’. 당시 인도에 만연했던 초월적 사고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수행하는 공부를 하는 현세와 다른 또 다른 세계에 도달하기를 욕망했습니다. 545p.에서 해탈에 이르는 여러 가지 길을 말했습니다. 그들이 경험한 세계냐? 이 세계에 그것이 있는가? 이 세계를 초월한 세계를 이야기하면서 해탈의 길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바라문은 소유를 여의지 못했고 하느님은 소유를 여의었습니다. 하느님과 교류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글의 서두에 ‘이런 문제를 던지려고 한다’가 있어야 한다고 하셨고, 글을 쓸 때 전체 프레임을 머릿속에서 짜고 나서 쓰기 시작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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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2-11 20:00
    이것저것 아리송한 채 넘어갔던 것들을 새록새록 알게 된 시간이었죠^_^ 경전 읽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닌 것 같아요 정말;; 내일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