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0529 수업 공지(게시판 옮겨 다시 올립니다)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17-05-27 11:39
조회
3204
불교와 우리 : <디가니까야> 강독 세미나의 반가운 첫 번째 세미나가 지난 월요일 진행되었습니다. 명륜동으로 이사하고 처음으로 개강한(이사 바로 다음 날이었죠) 프로그램인만큼 더 의미 있었지요.
다들 좋은 얼굴로 만나, 더 환해진 얼굴로 세미나를 마치고 헤어졌던 걸 보아 아무래도 예감이 좋습니다^^ 앞으로 끝까지 즐겁게, 성실하게 함께 공부해보아요.

원래 지난 불교n에서 <디가니까야> 이미 1품 하고도 조금 더 공부를 하긴 했습니다만, 모인 분들도 뉴페이스이고 하니 아예 심기일전, 처음부터 다시 읽기로 했지요. 워밍업 삼아 일단 다음 시간에는 나카무라 하지메의 <최초의 불교는 어떠했을까>를 함께 읽고 만납니다.
발제 순서: 1, 11장 수경 / 2, 12장 은남 쌤 / 3, 13장 이응 / 4장 유주 / 5장 임성희 쌤 / 6장 윤지 쌤 / 7장 배현숙 쌤 / 8장 복실 쌤 / 9장 정혜진 쌤 / 10장 최계숙 쌤.
보셨겠지만 각 장 분량이 그리 길지 않습니다. A4 한 장 정도면 내용 발제로 충분할 것 같아요. 다들 파이팅^_^

22일은 첫 날이니만큼 채운쌤의 인트로 강의가 비교적 간략하게 있었는데요, 다들 복습 성실히 하셨겠지만 그냥 넘어가면 서운하니 간략하게 복기해볼게요.

하나, <디가니까야>를 읽는 법. 한문 번역본도 물론 있습니다만 우리가 이번에 읽을 책은 빠알리 어를 번역한 경전이죠. 같은 경전이더라도 얼마나 질감이 다른지를 만끽해보심 좋을 것 같아요.
<디가니까야>는 니까야 중 가장 첫 번째로 결집된, 긴 크기의 경전으로 이루어진 모음집입니다. 총 3품, 각각 13경, 10경, 11경으로 구성되어 있지요.
최대한 꼼꼼히 읽고 글쓰며 진행해야 할 텐데, 사실 이게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게 아니라… 많은 경전들이 그렇듯 여기도 반복이 많거든요.
이 경전은 다양한 수행자들과 만난 붓다가, 그 상이한 조건들 안에서 상이한 방식으로 깨달음의 말씀을 전해놓은 것을 모아놓은 책이에요. 붓다를 찾아온 이들은 수행 시간도 저마다 다르고, 연륜도, 또 삶의 고민도 다르지요. 그래서 각자의 방식으로 말을 걸고 각자의 방식으로 붓다의 말을 이해하고 반응합니다. 그들을 만나 대기설법의 진수를 보여주는 게 우리 큰 스승님이시고요^^
그런데 이 서로 다른 조건과 만남 안에서도 반복되는 게 있으니, 가령 제1품 계행다발의 품에서는 매~번 짧은 크기의 계행, 중간 크기의 계행, 긴 크기의 계행이 등장해요. 한 번도 같은 조건에서 같은 말씀을 들려주시지 않는 붓다이니 반복해 등장하는 계행 역시 그 독특한 배치 안에서 다른 울림과 무게를 갖기 마련일 텐데, 실은 이게 까딱하면 읽는 이를 게으르게 만들기 십상인 거죠;; 읽었던 것, 익숙한 말들이니 스킵하고픈 유혹에 시달리는 일이 왕왕 있답니다.
그런데 다른 것도 아니고 불교 공부를 시작한 우리이니만큼 여기서 힘을 발휘해야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매번 새롭게, 성실히 경전 읽기에 임하는 것, 이게 우리의 수행이라고 생각하자는~~
붓다가 지금 어떤 이와 만나 말하고 있나, 똑같은 내용이더라도 붓다가 어떤 언어로 법을 말하고 있나, 반복되는 계행들 중 어떤 것이 이 場에서 독특한 색채를 부여받는가 등등을 염두에 두며 읽으시지 않으면, 이 경전, 엄청 지루하실 수 있습니다^^;;

둘, 불교 이전에 인도 땅을 지배하던 정신은 어떤 것이었나? 비교적 간단하고 명료하게 이를 설명하는 자료를 함께 읽었더랬죠.
선정의 세 단계에 대한 설명도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만, 그건 차차 이해하도록 하고요. 포인트는, 우파니샤드를 비롯한 인도의 종교적‧철학적 베이스가 없이는 불교가 출현할 수 없었다는 것 — 불교 사상과 붓다도 모두 특정한 인연조건의 산물인바, 연기의 바깥에서 스스로 존립하고 불변하는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답니다 — , 그러니까 깨달음을 얻기 전에 만난 여러 사상과 고행이라는 그 조건 안에서 붓다도 공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이고요.
더 중요하게는, 그럼에도 불교는 이전 사상들과 분명한 사상적 단절 위에 성립하는데, 왜냐하면 우파니샤드 사상가나 자아니교도들이 자기만의 사유 방식 안에서 ‘본질’ 내지 ‘절대적인 것’을 상정하고 추구했던 것에 비해 불교는 절대적인 것이란 없다, 아니 ‘있다’고 간주되는 세상 내 모든 것이 실은 凡人이 생각하는 바대로 있는 게 결코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수행의 핵심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파니샤드가 다른 것은 없어도 자아는 있다는 믿음 위에 梵我一如(브라만과 아트만의 합일, ‘내가 그것이다’)를 추구했고(“법열 안에서 개인의 의식은 평온과 정적을 특징으로 하는 고차원의 의식 형태를 지향하듯이, 자유를 획득하게 되면 개인의 실재는 반드시 ‘궁극의 실재’와 합일을 이루게 된다. 분명한 사실은 생멸의 법칙에 지배되며 온갖 종류의 번뇌에 오염된 경험의 의식을 거부하면, 개인 속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영원하고 변치 않으며 또 환희의 본성을 갖는다고 간주된 개인의 참된 ‘자아’를 주장하게 된다는 점이다.”), 자이나교가 순수 자아를 해방시키기 위해 극도의 고행을 실천했던 것을 보면 확실히 그렇지요.
불교의 사상적 혁명성은 바로 이 지점에서 엿보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나는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진리는 있다? 다른 건 다 변해도 변하지 않는 어떤 실재가 있다? 불교의 구도 안에서 보자면 그와 같은 생각이 탐착을 불러와 번뇌를 일으킵니다. 숱한 고행을 하고 알음알이를 닦고 수행을 해도 끝내 깨달은 나와 깨달은 상태에 대한 상을 버리지 못했을 때는 제아무리 수행을 많이 한 자라 해도 그는 중생의 고통으로부터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셈이지요.
“우파니샤드 전통은 변화와 무상을 환상이라고 부정하고 영원한 ‘자아’의 실재를 주장한 반면에, 물질주의 전통은 물질이 궁극적으로 실재한다고 생각했다. 자이나교도들은 영원성과 무상도 궁극 실재의 특성이라고 믿었다. 종교 측면에 있어 우파니샤드 사상가들은 구원을 ‘개인의 자아’와 ‘우주의 자아’의 합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물질주의자들은 모든 정신성을 부정하였고, 자이나교도들은 원래 순수한 ‘자아’가 업으로 인해 빠져든 존재의 굴레에서 ‘자아’를 해방시키기 위해 지나친 형태의 자기 절제를 강조하였다.”

자, 불교가 어떤 사상적 단절을 겪는지, 이제부터 차차, 직접 살펴볼 차례입니다^^ 한 학기, 모쪼록 수행하는 마음으로, 욕심과 집착을 버리면서도 성실하게 책을 만나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모두 즐겁게 읽으시고, 부디 성실한 발제 준비해주셔요~(찡긋)

+) 간식은 은남쌤께 부탁드립니다. 모두 공유했듯, 따로 점심시간을 갖지 않고 식사꺼리가 될 만한 간식으로 준비해주심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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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5-27 11:41
    게시판 옮겨 다시 올립니다. 제가 잠시 착각을 ㅎㅎ 혼란 일으켜드렸다면 죄송 죄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