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0605 수업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7-05-31 16:32
조회
3145
지난 시간에는 나카무라 하지메의 <최초의 불교는 어떠했을까>를 함께 읽고 모였지요. 자세한 후기는 은남쌤께서 올려주길 테고, 저는 다음 수업을 공지할 겸 간략한 정도로 복기 해볼게요.

여기서 시작해볼까요? ‘불교의 발생 또한 연기적 조건 안에서 가능했다.’
하지메의 설명에 의하면 도시가 커지고 유통경제가 활성화되면서 계급이 고착화되었던 게 그 즈음의 일이랍니다. 나라가 커지고 견고해지면서 왕족의 권력이 강화되었고 그에 따라 이전까지는 자연적인 구분 정도였던 카스트 제도가 한층 엄격해졌다고 해요.
다양한 회의론 및 도덕부정론의 출현이 이러한 맥락 위에서 이해될 수 있답니다.
날 때부터 정해진 위계? 선험적으로 있는 선과 악, 그리고 그에 따른 업의 과보? 윤회와 수행? 이 같은 설명 방식이 카스트 제도에 합리성을 부여하는바, 도덕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그들 나름의 역사 인식 위에서 이를 부정했던 거지요. 일체의 도덕과 상식을 무시하는 대신 그들은 아예 사회의 외부에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갔답니다.
하지만 자이나교의 경우는 약간 달라서 불살생주의를 표방하며 엄격한 수행을 통해 업을 소멸시키고자 했지요. 고로 출가수행이 강조되었고, 혹독한 고행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었답니다.

이런 조건 속에서 붓다는, 출가해 여러 스승을 만나고 고행을 시도하지만 이렇다 할 깨달음을 얻을 수 없어 괴로워했지요. 그러다 그가 도달한 것은 ‘무아’였습니다.
여타의 사상들은 상이하나마 어떤 절대적인 것이 있다고 상정했던 반면(하다못해 ‘없음’을 절대화하기도 했지요. 이를 단멸론이라 합니다) 붓다는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이 실은 특정한 조건들 안에서 일시적으로 발생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세계의 법칙이며, 제아무리 위대해 보이는 사상도 인간도 이를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무상과 무아, 이것 외에 불교가 달리 덧붙이는 것은 없답니다. 책에서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표현이 이와 연관되는데요, 무상이 인간의 사랑에 기초한 것이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상 개념은 결코 허무주의라 할 수 없거나, 혹은 세계에 대한 본질적 긍정을 나타내는 절대적 허무주의라 할 만합니다.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없는 이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특정한 조건에 따라 만들어지고 스러집니다. 이렇게 찰나찰나 만들어지고 사라지는 것을 긍정하고 아끼기 위해서는 세계의 무상성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 거지요.
생성을 긍정하고 소멸 또한 긍정하기 위해서, 생성된 것에 대해 집착하고 소멸한 것에 대해 고통스러워하지 않기 위해서, 인간은 지혜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또 한 차례 발견되는 붓다의 혁명성은, 그렇게 지혜를 갖춘 자는 그럼 이제부터 무엇을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에서 엿보이지요.
그는 신선이 되어 산으로 가거나 피안으로 가는 게 아닙니다. 그저 일상을 사는 것이지요. 자신의 조건을 투철하게 이해한 바탕 위에서 일상을 살아가면서, 다른 존재들과 더불어 사는 것, 그것이 붓다가 생각하는 자비행입니다. 당시의 다른 사상들과 달리 세속 안에 머물길, 실천적 윤리를 담지하길 권하는 게 불교라는 사실.

물론… 말이 쉽지요, 네네^^; 수업 중 채운 쌤 말씀이 인상적이었지요. 살아 있으니까 뭔가 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들입니다. 살아 있음을 표현하느라 각기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지요. 지금 어딘가에서 뭔가를 훔치고 있는 자도, 누구를 때리거나 얻어맞는 자도, 노래를 부르거나 책을 읽는 자도, 다 그렇게 자신을 표현하며 살고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야말로 이런 사람들을 무서우리만치 잘 그려내고 있어요. 병신 같고 머저리 같은 꼴로 사는 사람들, 왜 그러고 사느냐 묻고 싶은 사람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밖에는 자기 생명과 힘을 표현할 줄 모르므로, 열심히 그렇게 살아갑니다. 얻어맞고 바보 취급당하면서 자기 생을 느끼는 거지요)
문제는 이렇게 살면서 제 스스로 고통을 짓는다는 데 있습니다. 무지하게 살면서 평화로우면 그래도 나을 텐데, 인간은 제 하고픈 대로 하려다 늘 걸려 넘어지지요. 왜냐하면 세상은 제 뜻대로 안 되고, 도대체가 우리는 원하는 걸 제때 얻지 못하거나 혹은 얻은 뒤 잃을까 전전긍긍하고, 결국 잃고서 상심과 절망에 빠지기 십상이니까.
그가 부자든 빈자든, 권력자든 약자든 간에, 살면서 번뇌를 겪는 건 매한가지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무상을 깨닫지 못한 모든 존재가, 그의 사회적 조건과 무관하게 가여운 중생입니다.
무지한 중생들. 무엇에 무지한가? 세상이 무상하다는 것에 무지하고, 나라고 믿는 나는 실은 무아의 존재임에 무지합니다. 변화무쌍한 세계 안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탓에 쉼 없이, 분주하게 무언가를 하고, 그렇게 하면서 만들어지는 온갖 것들 가운데 특정한 것을 특정한 방식으로 붙들고, 그렇게 붙든 것을 실체화하고, 그렇게 실체화한 것과의 관계 속에서 ‘나’라는 것을 만들어 고수하지요. 나는 있고, 너는 있고, 세계는 있고, 삶은 있다. 이게 있으니 좋고, 저게 있으니 싫어서 없어졌음 좋겠고, 그게 없으니 슬프고……. 그러니 삶은 무겁고, 긍정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죽지 않는 한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이 없지만, 그렇다고 죽는 것은 너무 싫고 무서우므로 다시 아등바등하지요.

그러므로 붓다는 어떤 수행자들을 만나든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수행에 전념해 깨달음을 얻어라. 나에 집착하지 않고 ‘있음’에 매여 있지 않을 때 비로소 나는 자유로워진다.
그렇게 깨닫고 나면 나를 ‘나’라고 말해도 되고 물건을 ‘있다’고 말해도 된답니다. 말이란 것도 실체가 없는 것, 하나의 방편일 뿐이니, 그에 매이지 않을 수 있다면 사용할 수 있는 거지요. 아직 깨닫지 못한 자와 만나고 그와 더불어 삶을 고민하기 위해서는 역시 말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이게 방편일 뿐이라고 생각하면서 골똘히 문장을 읽고 해석하는 건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모든 게 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사는 게 불가능해 보이는 것만큼이나. 그런데 이건 말고 살면서 할 게 뭐가 더 있느냐고 반문하는 책을 만나고 보니, 네, 그 말이 맞기도 합니다; 투철하게 무상을 이해하고 살기 위해, 오늘도 우리, 불교 공부를~ >.<

 

자, 다음 시간에는 드디어 <디가니까야> 읽기 들어갑니다. 1품 1, 2, 3경 읽고 공통과제 써오심 됩니다. 분량은 A4 1, 2페이지 정도. 문제적 구절을 필사하신 뒤 해당 대목에 대해 자기 식으로 고민하고 이해한 과정을 풀어오심 됩니다.

간식은 이응과 유주 두 분께 부탁드렸습니다. 식사가 될 만한 간식으로 부탁드려요.

그럼 모두들 다음 주 월요일에 만나요~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