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6월 12일 수업 후기

작성자
복실이
작성일
2017-06-17 23:17
조회
2909
*부처님이 고행을 비판한 이유

고행을 해본 붓다는 기본적으로 고행이라는 것은 쾌락에 대한 억압이라고 생각했다.

붓다가 주장하는 무상을 깨달았다는 것은 쾌락을 억압하는 게 아니라 어떤 쾌락이 어떤 조건하에서 발생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로 자신이 처한 조건이 다르면 그 쾌락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어떤 쾌락에 집착하는 게 문제라는 것이다.

쾌락에 집착하는 것을 아예 억압적인 방식으로 물리치려고 하는 고행은 무상을 긍정하는 방식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나의 육신도 나의 마음도 조건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모든 느껴지는 감각과 쾌락을 부정하면 안 된다고 했다.

쾌락에 대한 부정은 두 가지의 금욕주의가 있는데 첫째 기독교적 금욕주의는 육체와 직결되어있다고 보고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육체의 학대가 필요하다고 본다. 동양의 금욕주의는 몸에 대한 금욕주의가 아니라 어떤 것에 필요이상으로 집착하는 과욕에 대한 경계이다. 동양에서는 육신에 대한 학대보다는 양생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와 같은 점에서 불교는 쾌락을 부정하는 여타의 기독교와 동양사상과는 다르다.

붓다의 금욕주의는 섭생이 중요한 문제였다.

우리의 몸과 마음에 대한 쾌락에 집착하지 않으면서 우리 생에 느껴지는 이 감각들을 긍정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이 감각을 긍정한다는 것은 좋아하는 것과 다르다.

여기서 긍정은 집착이 아닌 이러한 조건에서 이런 느낌으로 나오는 거구나 .이것이 또 다른 조건에서 만들어지면 지나가 버릴 것으로 지켜볼 뿐인 것이다.

집착하는 순간 이것을 잊을까 두렵고 이것을 계속 누리고자하는 갈애가 생긴다. 이것이 번뇌이다. 우리가 생에 누리는 것들 그 자체로의 부정이 아니라 감각은 그저 조건화되서 발생할 뿐이고, 발생의 관점에서 느낌이나 감각을 사유하게 되면 그 감각이 내가 붙들어야할 것으로 고정되지 않을 수 있다. 고행자들은 이렇게 신체를 억압함으로 어딘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인데 이러한 조건적인 발생을 긍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붓다식의 깨달음이 없는 계율만 있을 뿐이다 이것은 교조주의일뿐이라고 채운 선생님께서는 강조하시며 말씀해주셨다.

*. . 혜에 대하여

불교는 철저하게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이 몸과 함께 생겨난다고 본다. 몸으로 이루어진 영혼이나 모든 것이 조건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은 어떤 것에 내가 관념을 가지게 되는 것인데, 이이러한 관념에 대한 것이 단순히 내가 있고 대상이 있어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용어로 인식주체 (根)과 대상 (境)이 라는 것이 있다 근과 경이 동시적으로 접촉을 해야 식(識)이라는 것을 만들어 낸다고 본다. 이러한 원리로 불교에서는 이 세계를 이해한다는 지혜가 몸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이 몸에는 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 행위를 할 때는 우리 몸에 뿌리 깊은 의식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따라서 깨닫는 다는 것은 조건화된 몸의 습관을 바꾼다는 것이다. -이것이 계(戒)이다. 계는 해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래야만 교조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두 번째로 정(定)이란 인간이 일상적으로 하는 의식의 수준으로만 살아가는 게 아니라 그 의식을 초월하는 의식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자신의 개체성을 뛰어넘는 그런 마음의 영역이 있는데 마음이나 뇌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연구를 많이 하고 있다. 이 영역을 열어서 의식과 무의식의 차원을 활성화 시켜주는 명상법이 선정이다. 선정의 단계는 6단계가 있다. 최종단계는 열반이다.

해 –앎이란 무엇일까? 바로 자기존재가 앎을 통해 변환되는 지점이다. 쏘나단다처럼 휼륭한 사람이라도 이 계 정 혜를 가지지 못했다. 자기존재가 앎을 통해 변환되는 그 능동적 측면이 바로 해이다 그 지혜는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자기 스스로가 그 지혜를 얻기 위해 무던히 노력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 능동적 지점이 머릿속으로만 아는 게 아니라 계. 정 같은 수행을 통해 신체를 바꿔야만 한다.

이것은 사람들 속에서만 가능하다. 인간은 같이 있어야 사람이 된다. 그리하여 몸에 새겨지는 것은 그 연기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사람들과의 번뇌의 부딪힘을 느껴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계는 무엇이고 정은 무엇일까?

바로 여기 규문처럼 함께 공부할 수 있는 공동체라고 선생님께서는 말씀해주셨다.

책을 읽을 때 선정에 들도록 노력하고 나의 초감각적인 능력을 개발하며

우리가 집착하도록 하고 그로부터 달아나는 삶을 계획해보라고도 독려해주셨다.

우리가 탐착하고 집착하고 탐욕스럽게 하는 것이 자본주의적 욕망의 구조가 우리의 삶을 조건 짓고 있다면 지금 붓다의 가르침을 배우고 있는 나는 무상성을 깨달음으로부터 내 삶을 다시금 조건지어보라고도 하셨다.

하루하루를 선생님의 말씀과 붓다의 경전들을 읽고 반복해서 곱씹으며 내 나름대로의 배움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무척이나 어렵고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지만 내 생활에 젖어들게 하기 위해 무던히 반복하고 있다.

나는 여기 잘 온 것 같다.

살다보니 난생 처음으로 용기내서 뵙고 싶었던 선생님을 만나고 배움의 인연으로 이곳에서 좋은 분들도 만나고 있다.

난 참 복이 많은 사람이다.
전체 4

  • 2017-06-18 14:44
    복이 많아 복실쌤이신가요^_^ 네, 정말 잘 오셨어요. / 문자는 다 엄살이셨네요. 복습 열심히 하셔서 다음에도 성실한 후기, '제때' 부탁드립니다 ㅎㅎ

    • 2017-06-19 10:05
      힘들었어요. ㅠ
      글을 써낸다는 자체가 출산처럼 애쓰는 거라고 하더니 ㅠ

  • 2017-06-18 14:47
    "책을 읽을 때 선정에 들도록 노력하고 나의 초감각적인 능력을 개발하며" -> 이렇게 말하면, 내가 마치 무슨 이상한 초감각이라든가 뭐 그런 요상한 뭔가를 말한 것 같지 않습니꽈!!!! ㅋㅋㅋ(이 후기를 읽으시는 분들은 아래 또 다른 후기와 공지를 꼬옥 참고하시길!^^)

    • 2017-06-19 10:06
      사랑합니닷! 슨상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