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6월 26일 수업후기

작성자
현정숙^^
작성일
2017-06-29 15:23
조회
2763
저번 불교와 글쓰기 시간에는 2품 큰 법문의 품 14장에서 16장까지를 읽고 수업이 진행되었습니다. 2품은 마하(大) 바라, 큰 가르침의 경들이어서 그런지 일단 분량도 많고 그만큼 중요한 불교의 근본 사상들이 풍성하게 펼쳐져 있는 장들이었습니다. 불경을 처음 읽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더 많이 듭니다. 사실 불교의 핵심 논리들은 대중에게도 잘 알려져 있지요. 무상이나 무아나 연기나 한 번씩은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친숙하지만 이만큼 어려운 사상도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드네요. 쌤께선 불교의 교리는 너무나 단순한 진리라고, 그 단순함이 우리의 사고 자체가 가지고 있는 잉여를 쳐내는 단순함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자기와 싸우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에 깊은 공감이 되었습니다. 요즘 무아에 그리고 원인과 조건에 대한 사유로 머리를 쥐어짜내고 있는 저로선 거듭거듭 제가 버리지 못하는 것들과의 싸움의 연속이네요. 늘 번뇌를 들먹이며 살고 있는 저로서는 ‘번뇌가 뭔지 아느냐’, ‘정말 자기가 겪는 걸 번뇌라고 생각하느냐’, ‘자기 번뇌를 응시하는 힘이 있느냐’라는 쌤의 말씀에 뜨끔했습니다. 알겠다고 이해한다고 말하면서도 그런 제 말에 왠지 힘이 더 안들어간다고 느끼는 요즘이라서 ‘계속 안다고 생각해도 어떤 비약이 일어나지 않는 건 문제가 절실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쌤의 말씀에 죽비로 맞은 듯 얼얼했습니다.^^ 절실함, 깨닫고야 말겠다는 절실함 그런 발심이 나에게 있는가. 왜 나는 이리 마음을 냈으면서도 미적미적 무겁기만 한 건가. 분명 이런 번뇌 속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공부의 길로 들어서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발심의 강도는 옅어져만 가는가. 공부 그리고 삶에 대한 절실함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부처님의 수행이 곧 깨달음이라고 배움 자체가 깨달음이라고 입으론 말하면서도 글에는 여전히 배움 따로 깨달음 따로 써놓았음도 쌤의 친절하신 지적으로 알아차립니다. 이분법적, 목적론적 사고는 얼마나 강하게 저를 지배하고 있는지요. 여전히 배움이나 앎의 어떤 상을 상정하고 배움 따로 수행 따로 깨달음 따로, 단계적이고 선행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과정으로 사유하는 것이 구성적 관점에서 사유하는 일이 참 어렵습니다.

무지에 기반해서 믿는 것은 믿음 자체가 절대화되지요. 그 존재가 절대적 신앙의 대상이 되고 사람들은 의존하게 됩니다. 절대적인 믿음, 변치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을 믿는 것은 자기 스스로의 힘을 사용하지 않는 것인데 반해 불교의 진리는 변치 않는 게 없다는 것이고 스스로가 깨닫고 그 깨달음을 위해서 자신에게 복종하는 능동적 종교입니다.

모든 경전들은 후대인들이 이야기로 만들어놓은 것이어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지금 우리가 불교와 접속할 수 있는 여지는 다양합니다. 14장 비유의 큰 경은 불교의 위대한 스님들의 일대기를 이야기로 풀어놓은 불전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붓다 이전의 부처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저는 붓다 이전에 왜 이리 많은 부처가 있는지 사실 부처님은 단 한 분뿐인 걸로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왜 언제 태어나고 무슨 신분이고 수명은 몇 살이고 무슨 나무에서 태어났고 제자는 몇 명이고 부모와 태어난 도시들이 열거되어야 하는지 질문을 했었는데요. 쌤의 설명을 듣고 이해가 되었습니다. 붓다는 깨달음의 시초가 아니라 깨어있는 자에 불과하다는 것 어떤 존재의 깨달음과 배움이라는 것도 인연조건 없이 생겨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참 인상 깊습니다. 유일무이한 자로 절대시하지 않는다는 거. 붓다가 무수히 많다는 거. 어느 시대나 깨달은 자가 있다는 것.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의식 속에서 거기서 길러낸 문제의식들로부터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 그렇게 모든 것은 연기조건에 따라서 생겨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14, 15경은 불교의 중요한 주제인 연기를 설명하고 있지요.

경전은 고도의 상징문학이죠. 깨달은 자가 왕족 출신이라기보다는 고귀한 가문 출신이라는 것도 상징입니다. 언어가 이 세계를 고스란히 지시하는 게 아니지만 언어 없이 지혜를 전달할 수도 없는 것이 사실이고 단지 그 언어에 얽매이지 말고 사용하라는 말씀이기에 불교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말 그대로 상징, 비유입니다.  혼자만의 깨달음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특정한 인연조건 속에서 그런 깨달음을 얻었기에 또 다른 인연조건 속에서 그 깨달음을 베푸는 의미에서 제자를 만들고 수행승들이 모이게 되는 것이며 부모와 도시를 연하여 태어나는 것도 시공간의 조건 없이 깨달음이란 없다는 깨달음의 완벽한 인연성을 보여주는 상징들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형이상학적 앎이라기보다는 번뇌의 발생에 대한 앎, 번뇌가 어떻게 발생하는지 그 메커니즘을 깨닫는 것입니다. 마음의 해탈은 십이연기를 가지고 엄청난 통찰력이 생겨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오온이 발생하고 어떻게 소멸하는지 즉 사성제, 일체개고, 제법무상을 이해하는 것이 전부이고, 이것이 유일한 가르침이고 깨달음입니다. 평소에 ‘인생이 苦지 그럼’ 이렇게 생각해온 일인이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苦’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것도 쉽지 않은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고란 고통이 아니라 dukha 만족하지 못함이라고 하셨죠.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잔인무도한 일도 나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도 다시금 생각해보게 됩니다. 나를 포함한 우리가 형성한 마음의 장에서 벌어진 일이고 나도 일조하고 있다는 자각. 깨달은 자가 가지고 있는 자비심이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겪는 것. 나의 번뇌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번뇌 속에 있다는 것을 자기의 번뇌처럼 아프게 아는 것, 이것이 자비라고 말씀하십니다.

32상도 흥미로웠는데요. 불상도 이에 따라 만들어진다고 하셨는데 인간 비인간을 구별하지 않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끌어안은 형상으로 어떤 분별도 갖지 않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이 인상 깊었습니다. 이에 비하면 고작 인간을 닮은 모습으로 신을 상상하는 일이 얼마나 비루한지요.

‘무엇을 조건으로’ 즉 조건적 발생의 법칙인 연기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노사⟷유⟷취⟷애⟷수⟷촉⟷육입⟷명색⟷식⟷명색은 이와 같이 상호조건으로 생겨나고 소멸한다는 것. 저는 아직 명색이니 오온이니 하는 말이 어렵게 느껴지는데요. 모든 연기는 이 몸과 이 마음을 조건으로 하지요. 어떤 것도 조건이 없이는 생겨나지도 소멸하지도 않습니다.

제가 무아를 너무 도식적으로 이해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내가 없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은 조건지어져 있다는, 영원불멸하는 방식의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 게 무아라는 데 제 나름 조금씩 접근해가고 있는 느낌입니다. 주체는 구성된다는 것 나는 오온이 조건화된 결과라는 것. 내가 번뇌를 겪고 있는 것도 어떤 조건 속에서이고 그 조건이 달라지면 또 달라진다는 것. 욕망도 조건 속에서 생겨나는 것인데 그걸 모르고 욕망의 경향에 만족해서 끌려가며 업을 만들면서 연기조건을 사유하기 힘들다고 하고 있지요. 조건을 보지 못하면 멸도 할 수 없습니다. 이렇듯 그 조건을 바라보고 사유하는 게 불교고 철학이라는 것을 다시금 알게 됩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인연이야말로 위대한 인연조건이라고 하셨지요. 이렇게 불경을 읽고 쌤께 가르침을 받고 도반들과 더불어 배움을 공유하는 이 인연 조건이 참 감사하게 느껴지네요. 제가 이런 인연의 장 속에 있다는 사실이 문득 실감이 납니다.

우리의 상태를 아니 저의 상태를 알아차리신 것일까요. 자비로우신^^ 쌤이 한 템포 쉬어가게 해주시네요. 다음 시간 그 자체로 독립적이고 아름다운 경인 대반열반경을 다시 읽고 사유하며 저는 또 어떤 알아차림을 마주하게 될지 기대해봅니다.^^
전체 2

  • 2017-06-29 18:26
    저도 지난 수업에서 자비에 대한 새로운 설명이 흥미로웠어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겪는 것.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공감'과는 다른, 어떤 비약이 여기 요구될 텐데, 이를 말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아요 끙^^; 저도 곧 수업공지 올리겠습니다...

  • 2017-06-29 23:00
    큰 법문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너무 어려웠는데 꼼꼼한 후기 고맙습니다 ^^ 쌤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전해져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