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0703 수업 공지요~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7-06-29 20:28
조회
2917
지난 시간에는 2품 14, 15경을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눴습니다.
16경 대반열반경은 꼼꼼히 살펴봐야 하는 관계로 다음 주 월요일에 단독으로 수업 진행됩니다. 다들 한 번 더 읽어오시고요, 공통과제는 16경으로 준비해오심 됩니다. 뒤에 이어질 경들도 이 참에 미리미리 읽어보심 좋겠죠.

이번 주 후기는 현정쌤. 간식은 저와 혜진쌤이 준비합니다.

누구나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가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있기 마련이지요. 이게 맞고 저게 틀리다는 판단에도 나름의 근거가 있고, 그런 판단에 근거해 어떤 것을 취하거나 버립니다.
자동적으로 나오는 아주 작은 행동 하나하나, 취향 하나하나가 나름의 실제적인 역사 위에 구성되어 있음을 간과하고 이를 나의 특성, 나의 선택이라 여기는 게 보통입니다만, 채운 쌤 설명에 따르면 개인의 습속이라는 것도 모두 사회 안에서, 특정한 인연조건 안에서 굳어진 것이랍니다. 개인이 살아온 몇 십 년 간 내지 인간 종 출현 이래 몇 만 년 간 만들어져 진통 가운데 몸에 배고 굳어진 것들이죠.
고로 개인의 습속은 관념으로 바꿀 수 없고 단번에 바꿀 수도 없다는 게 채운 쌤의 설명입니다.
마인드컨트롤로 인간이 바뀔 수 있다면, 한 번의 결심으로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실은 습속이 쌓여온 그 시간만큼, 습속이 만들어지기까지 들인 에너지만큼을 들이지 않는 한 한 번 만들어진 행위와 사유 양식의 방향을 틀 수 없다는 거죠.
문득 한 인간이 출가를 결심하는 일은 그런 의미에서 그의 생에 어마어마한 사건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자신의 변신을 위해 자신이 놓인 조건 전체를 버리고 떠나길 꾀한 거니까요. 나를 바꾸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 결심과 반성, 계획표를 만드는 일보다 근본적이고 시급한 일은 조건들의 장을 바꾸는 일입니다.
이처럼 조건의 장을 바꾸겠노라는 결심에 이르는 데 있어 결정적인 것, 그것이 발심(發心)입니다. 그것은 의무도 아니고 누가 대신 지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순전히 나의 지극한 ‘욕망’에 다름 아니지요. 지금 내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겠다는 욕망, 배우고 깨닫고야 말겠다는 욕망!
그러니 타인인 그 누가 대신 그와 같은 욕망을 만들어줄 수 없는 노릇입니다. 어떤 것을 배우고 깨치고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지극한 욕망에서 비롯된 능동성이 필수적입니다.

채운 쌤은 우리가 입으로는 번뇌롭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제 번뇌를 들여다보려 하지 않고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도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번뇌롭다고 말하는 데에서 모종의 쾌감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지요. 자신의 번뇌를 남에게 투사하는 정도면 어느 정도 삶에 만족할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허나 대부분의 중생이 그렇게 번뇌 안에서 끊임없이 제 고통을 지으며 살고 있는 와중에도 극소수의 사람들은 발심한 뒤 수행하고 마침내 부처가 되는 경우가 있지요. 우리가 14경에서 읽은 게 바로 그들, 붓다 이전의 과거불들이었습니다.
발심 후 수겁 동안 윤회하면서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아 마침내 깨닫고 해탈한 자들이 붓다 이전에도 있었고 붓다 이후에도 있으리라는 게 14경의 가르침이지요.
부처들이 다다른 깨달음의 내용은 무엇이던가요? 그것은 무상과 무아. 곧 한 존재가 태어나고 깨닫기까지 뭇삶들의 삶과 배움과 좌절 등등이 거기 연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달리 전생이 있는 게 아니라 한 존재의 탄생 이전 모든 사건들이 곧 전생이니, 그런 의미에서 연기 조건에 대한 통찰이야말로 전생에 대한 앎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로 한 존재의 깨달음은 그만의 탁월한 능력의 결과가 아니라 다른 모든 존재들을 조건으로 이루어졌다고 여겨야 한답니다.
이 같은 사실을 온몸으로 깨우친 자, 이들을 일러 깨달은 자, 해탈한 자라 부릅니다.
붓다가 유일무이하게 뭔가를 해낸 자가 아니라는 것, 어떤 앎이나 경지의 기원이 아니라는 것, 이 점이 중요하다는 채운 쌤 말씀을 이와 연결 지어 이해하면 좋을 것 같아요.
붓다는 자신이 모든 것에 연해 있다는 것을 아는 자, 자신의 깨달음이 연기적 조건 안에서 가능했음을 아는 자이고, 그런 의미에서 세계와 법에 대해 눈뜬 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세계 바깥에 있는 자도, 세계를 만든 자도 아니랍니다.

깨달은 자가 회향하는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수순이라는 게 채운 쌤 설명이었습니다. 인연들 속에서 받은 깨달음이므로 내 소유가 아니니 이를 다시 인연 안에서 풀어내야 한다는 것. 번뇌로 하여 깨달을 수 있는 게 이 세상이며, 중생이 곧 부처가 되는 게 세상이고, 그 모든 것이 내가 받은 인연들 안에서 가능했던 것이니, 깨달은 자는 이를 떠나기는커녕 그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바를 합니다.
여기서 지난 수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설명이 이어지지요. ‘자비심’에 대한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자비란 무엇인가? 그것은 많은 것을 구비한 자가 적은 것을 구비한 자에게 나눠주는 게 아닙니다. 나눠줄 내 것도 없고, 나와 무관한 대상/타인도 없습니다.
오히려 보살은 지금 나와 함께 이 장을 살고 있는 중생들이 겪는 마음의 장, 그것을 자기 마음으로서 겪는 자라는 게 채운 쌤의 설명이었습니다.
어린아이를 잔혹하게 살해한 또 다른 어린아이, 어린자식을 짐승으로 여긴 어린 부모… 뉴스에 나오는 온갖 이야기들에 시청자들은 혀를 차며 눈을 돌리지만, 보살의 자비심은 그 모든 일을, 그 모든 마음을 나와 무관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므로 전존재로 그것을 함께 겪습니다.
...…저는 이게 정확히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채로도 수업 시간에 들으면서는 마음이 흔들리기야 했는데, 이를 뭐라고 설명해낼 수 있을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단순히 공감 능력 같은 건 아닐 것 같은데 말이죠. 깨닫지 못하고도 성정상 그런 이들도 많잖아요?
말문이 막히는 이런 순간마다 절감하곤 하지요. 깨닫는다는 것은 자신이 습관처럼 늘어놓는 문장의 개수들과는 무관한 것이라는 것.
가야할 길이 멀고도 멀다는 생각을 또 한 번 합니다;;

그러니, 우리 다음 주에도 걍 뚜벅뚜벅 꾸역꾸역 걸어가봐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충격적인 이야기들이 즐비한 길고 긴 길이 우리 앞에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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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6-29 22:52
    지난 수업에 빠져서 공지 많이 기다렸어요... 쌤 늘 공지 고맙습니다 ^^ 발심이 조건의 장을 바꾸는데 결정적인 것이라는데 놀랐어요... 물리적 조건을 탓하는 것은 회피하고자 하는 마음이 만들어내는 핑계거리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