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10월 9일 수업후기

작성자
현정
작성일
2017-10-12 17:20
조회
2785
저번 시간에는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사법인, 무아 등 불교의 중요 핵심 개념을 다시 배웠습니다. 샘이 항상 설명해주시는 개념들이기도 하지만 전 이제야 이 개념들이 좀 명확해져가는 느낌입니다. 결국 사성제, 팔정도가 전부다. 이런 말을 들어도 그게 무슨 뜻인지 사실 감이 잘 안 왔는데 이제 더듬더듬 찾아가고 있는 느낌입니다.

저번 시간 ‘苦’에 대해서 나름대로 정리를 했지만, 수업을 들으며 새롭게 다가왔던 것이 ‘삶 자체가 苦’라는 걸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매번 ‘인생이 고지’ 이렇게 쉽게 말하고 살았지만 정말 인생이 고통 그 자체라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는가는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고통스러운 일을 겪을 때만 괴롭다고 느끼고, 또 좀 살만하면 그래도 ‘인생은 아름다운 거야’라며 환상을 짓는 게 저의 모습이니까요. 삶 자체가 행복이라는 생각도 평소 잘 들지 않았지만 왜 삶 자체가 고통이라는 것도 직시하지 못했을까, 아니 어쩜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부정하거나 회피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살만 하기를, 즐거운 것이기를 바라면서요. 이런 삶에 대한 부정과 회피가 결국 실체론과 목적론적 사고와 허무주의로까지 연결되지요. 그래서 얼핏 저도 불교는 허무주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졌던 적도 있는데요. 이번 시간 샘의 설명을 들으면서 불교야말로 얼마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사상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실 인생이 고(苦諦)라는 것을 깨닫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대부분 여기서 그치지지요. 고통의 원인이 우리의 무지와 욕망, 집착(集諦)에 있다는 것을 알더라도 그걸 멸할 수 있다는 것을 진심으로 믿지 못합니다. 그런데 붓다께서는 우린 고를 멸할(滅諦)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걸 깨달은 상태로 가는 구체적 실천(道濟)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고집멸 그리고 그 멸을 향해 가는 도 즉 끊임없는 일상의 실천, 수행이 있기 때문에 결코 허무주의가 될 수 없습니다. 어찌 보면 이렇게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종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리도 친절하게 인간의 생존 조건인 고와 그 고가 발생하는 메커니즘 그리고 그 고를 멸할 수 있는 구체적 지침(八正道)까지 가르쳐주시는 데도 난 왜 못 알아먹을까 고민해봅니다. 샘 말씀처럼 고와 메커니즘을 배워가고 있으면서도 아직까진 그걸 멸할 수 있다는 것을 진심으로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 길이 너무 힘들고 오래 걸리지 않을까 미리 걱정하고 의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십이연기는 지난 시즌부터 내내 제 고민 지점이기도 하지요. 연기법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막상 그리 어려운 개념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뭔가 확연히 잡히지 않는다는 생각을 해왔는데요, 이번에 수업을 들으며 한층 이해가 되었습니다. 십이연기는 번뇌에서 고로 인과관계를 도식화한 것이죠. 번뇌라는 마음의 작용으로부터 우리가 실제적으로 겪는 모든 작용을 촘촘하게 나눠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①無明-②行-③識 이 과정이 하나의 세트로 惑 業 苦 라고 얘기하고 다시 말해 탐진치이지요. 윤회를 거듭하는 것은 우리가 ‘있다’라는 생각을 끊어내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걸 깨닫지 못하고 번뇌 속을 윤회하는 상태가 무명이고 이 무명이 출발이자 끝입니다. 무명 속에서의 윤회 이것이 혹업고이지요. 미혹되기 때문에 업을 쌓고 그게 또 고를 낳고. ④名色 명과 색이 결합돼서 대상세계를 구성하고 ⑤六入(眼耳鼻舌身意) 인식작용이 성립하고 ⑥觸 감각기관과 대상, 인식의 주체(근, 경, 식)의 결합을 통해서 마음이 대상에 접촉하고 ⑦受 감각, 느낌이 생기고 ⑧愛 애착을 갖게 되고 ⑨取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하고 ⑩有가 생깁니다. 유의 가장 큰 결과는 ‘나’이고 이 윤회생존의 주체인 유로부터 ⑪生과 ⑫老死를 반복하게 됩니다. 有가 윤회의 고리에서 핵심이고 이 유가 있기 때문에 생사를 거듭하면서 이 고리를 돌고 도는 것이기 때문에, 유를 끊어내는 것이 십이연기를 이해하는 데 핵심이라는 말씀이 크게 와닿았습니다. 결국 내가 있다 네가 있다는 이 ‘있음’ 즉 실체적 사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린 다시 무명으로 돌아가서 다시 업을 쌓고 그걸 가지고 의식을 만들어내고 그게 다시 반복되는 고리를 끊어낼 수 없습니다. 시간에 대한 사유를 고민하면서 잠깐 실체적 사유에서 조금은 벗어난 것 같은 착각을 했던 것이 무지 부끄러워지더군요.ㅠ

유→생사→무명으로 다시 시작되는 이 고리를 어떻게 끊어낼 것인가 이 지점에서 무아라는 개념이 들어온다고 생각됩니다. 나라는 실체가 없다면 생사도 있을 수 없겠죠. 이건 별로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됩니다만, 사실 두고두고 생각해봐야 할 지점입니다. 무상과 무아는 같이 이해될 수 있죠. 무상하기 때문에 인연조건 속에서 생겨나는 모든 것은 무아죠. 我가 없다는 말은 有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고요. 유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인데 대상이 있어서 대상이 있다고 하는 게 아니라 대상이 있다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아는 무의식의 차원이기 때문에 무아를 깨닫는다는 건 우리의 무의식을 전변시키는 말하자면 어려운 일이지요. 자아나 무아에 대해선 다음 시간 숙제이기도 하니까 계속 고민해봐야겠습니다. 저는 유가 있을 때만 그 유로부터 어떤 소유나 그것이 낳는 뭔가가 생겨나는데 그 유가 없다면 다시 말해 실체로 존재하는 어떤 것도 없다면, 세상은 끊임없이 차이화하는 그 세계 자체가 아니겠냐는 샘의 말씀도 인상 깊었습니다. 이것이 영원회귀라는 말씀도 좀 더 깊이 생각해봐야겠구요.

인연조건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기계론적인 인과와는 다르다는 설명도 다시 해주셨지요. 불교에서 인연이란 인과 연이 끊임없이 바뀌지요. 그 끊임없이 변화하는 인과의 전체상을 보는 것이 연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피노자를 배우면서 원인과 결과의 사유에 대해 고민을 했었는데, 기계적 단선적 인과가 아니라 중층적이고 구조적 인과라는 말이 좀 더 연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연기조건을 이해하면 세상에 나와 무관한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정말 받아들이게 됩니다. 내가 이미 그 인의 한 작용으로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저절로 자비심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지요. 물론 아직은 머리로만 이해하는 듯해서 돌아서면 또 나랑 무관한 일 인양 까먹고 아니 무관한 일이었으면 하고 발뺌하고 싶어하지만요.

사실 연기조건을 깨닫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라는 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연기를 깨닫는다면 누굴 탓할 것도 없고 애착을 가질 필요도 없겠지요. 내가 좋다고 생각해서 애착을 갖는 것이 실은 괴로움의 씨앗이라는 것도 동시에 깨닫게 될 테니까요. 샘 말씀처럼 ‘인연을 따라 드러난다’는 말도 두고두고 생각해볼 지점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제게는 흥미로웠던 개념들이 풍성했는데요. 行이 드러나는 행위뿐만 아니라 잠재적 형성력으로 우리가 행위하는 것은 그때의 인연조건을 따르는 것이지만, 그렇게 발생했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잠재력으로 남아 즉 ‘종자’로서 우리 안에 흔적을 남기고, 그 다음의 행을 만들고 습이 된다(熏習)는 것을 업을 통해 설명하는 것도 흥미로웠습니다. 습관이라는 힘이 얼마나 센지 매번 실감하는데 왜 우리가 반복적인 행위를 거듭하는지를 이해하게 되더군요.

<디가니까야>를 읽으며 깨달음을 얻으신 붓다께서 중생들에게 설법하시는 것을 망설이셨던 대목이 인상 깊었었는데요. 이제 생각해보니 붓다께서 깨달으신 그 어마어마한 사유를 중생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망설이셨던 그 자비심이 더 와닿네요. 나라는 게 없다는 걸, 모든 게 무상하고 고라는 걸 저 같은 중생이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불교의 놀라운 전환점은 그 어쩔 수 없음이 슬프다라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조건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게 되면 누구나 거기에서 지복에 도달할 수 있다는 통찰에 있습니다.

샘은 항상 불교의 언어를 가지고 지금 자기가 겪고 있는 문제들을 재해석해보려고 노력하라고 말씀하시는데요. 그게 저한테는 아직 어렵지 말입니다.^^ 그런 노력이 잘 드러나는, 불교의 사상을 심리학으로 풀어서 지금 우리의 언어로 잘 설명해내고 있는 두 권의 책을 소개해주셨습니다. <붓다의 심리학>에서 我를 나르시시즘으로 푸는 대목이 설득력 있게 느껴졌는데요. 인간 존재는 본질적으로 나에 대한 느낌이 생성됨과 동시에 불안이 함께 생기고 이런 근본적 불안, 원초적 억압에서 오는 분리와 불안의 감정을 채우려고 뭔가를 끊임없이 갈구하지요. 내가 있다는 자기동일성을 전제하면서요. 그러나 붓다께서는 ‘그건 원래 채워지지 않는 거라고 그러니까 채워질 수 있는 네가 있다는 그걸 버려’라고 명쾌하게 말씀하십니다. 원래 채워지지 않는 게 존재라는 걸 이해하게 되면 갈구하는 것도 없게 된다는 무아의 전략을 쓰고 계시죠. 이렇게 단호하게 말씀해주시는 데도 못 알아먹죠.ㅠ 제가 평소 농담조로 제 기본 정서가 슬픔이라고 얘기하는데요. 그게 좀 더 이해가 되었습니다. 나라는 것 자체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불완전함을 느끼는 건데, 자꾸만 거꾸로 완전한 게 있는데 그 완전한 걸 채우지 못해서 불완전하다고 느끼면서 끊임없이 망상을 짓고 번뇌로 자신을 괴롭히는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 더 자각이 들었습니다.

또 다른 책인 <심리치료와 불교>에서 앞에서도 언급했던 업, 습관적인 잠재적 힘이 지적인 경험에서 기억으로, 감정과 생각 등의 경험에서 기질과 성격으로 작용한다고 설명되는 부분도 흥미로웠습니다. 결국 저의 기질, 성격, 기억은 다 저의 업입니다. 연기조건 속에서 행위가 발생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습관적 힘으로 잠재해 있다가 또 그 행을 출현시키죠. 행위 자체는 하나 하나 끊기는 건데 그걸 하나로 이어붙이는 힘이 우리의 업입니다. 그 업력에 의해 우린 매번 다른 연기조건을 관통하면서도 자아를 연속적인 실체로 느끼고 어떤 동일성을 구성하면서 살아간다고 느끼게 되죠. 연기조건 속에서 생겨났다 사라지는 것을 접착제로 붙이는 이 습관적 힘 때문에 우리는 발생적 차원에서 인식하지 못하고 연속적으로 인식하게 되지요. 우리가 왜 연기조건을 이해하기 힘든지도 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구성적 사유, 발생적 측면에서 사유를 한다면 자의식도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말입니다.

‘불교 개념이 느끼는 것과 비례한다’는 샘 말씀도 계속 생각해보게 됩니다. 니체를 공부하며 느낌의 차원에 대해서 조금은 감을 갖게 된 저로서는 여전히 막막하고 막연하지만, 그 힘의 느낌을 좀 더 사유해서 불교와 니체를 꾸준히 돌파해가고 싶은 발심이 생기네요. 어제까지도 도반들을 붙들고 힘들다고 징징대던 제가 말입니다. 다시 정신을 차려보는 것도 아승기겁의 연을 쌓아 만난 스승님과 도반들 덕분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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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0-13 16:16
    워~ 멋진 수업 정리에요. 감사함다 쌤. 저도 이번에 새삼 '습기'와 '훈습' 개념이 인상적이었어요. 우리의 목표는 습기 제거!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