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10월 16일 수업 후기

작성자
이응
작성일
2017-10-19 23:55
조회
2754
(마음의 경향)
이번 불교 강의에서 깜짝 놀란건 ‘왜 나는 다른게 안 보이고 이게 보이는걸까?’ 하는 질문이었어요. 과제에 매냥 ‘나를 관觀해야 한다’는 말을 써놓고 정말 자신을 본다는 게 뭔지 모르고 살았던거 같아요. 부처님은 “자주 사유하고 숙고한 것은 무엇이든지 점차 마음의 경향이 된다”고 하셨는데, 내가 평소에 무얼 보고 있는지가 내 욕망이고 마음의 경향이었구나, 그냥 그것이 나였구나 생각하니 제가 하는 말과 행동들이 참 많이 부끄러웠어요.

(다른 사유의 길)
왜 공부하면서도 여전히 감각적 쾌락에 탐착하고 있는걸까? 이건 정말 정말 뜨끔하고 와닿는 물음이었어요. 암만 불경에 밑줄 치며 읽어도 간식 앞에서 정신이 홀랑 나가는건 왜인가! 그것은 아직 감각적 쾌락이 공부보다 더 힘이 세기 때문이예요. 이 힘의 중심점을 전복시키지 못하면 암만 공부한들 무의식은 여전히 중생의 삶을 살도록 윤회시키고 말거예요. 때문에 정말 수행을 하고자 한다면 그 의식이 형성되는 조건을 철저히 사유할 필요가 있는거지요. 이 매커니즘을 파악하고 해체하지 않으면 쾌와 불쾌가 강해지고, 어느새 몸의 쾌락에 끌려가게 되지요. 어떤 것은 탐착하고 어떤 것은 피하고자 하는 이런 의식구조가 점점 강해지게 되면 어느새 괴로움을 자가생산하게 되지요. 스스로 괴로움을 발생시킨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좋고 싫음을 ‘원래부터 그런 것’으로 아니, 이것이 ‘아상’이 아니고 무어겠어요. 좋아하는 것들로 자기 생을 유지하고자 하고 거기에 집착하는 것, 그게 아상이고 어리석음이지요.
채운샘은 다른 길을 내도록 자꾸 사유하고 숙고해서 습을 바꾸어내는 게 수행이라 하셨어요. 일상에서 화두를 둔다는건 내가 배운걸 품고 다니며 사는 것이래요. 공부한다고 백날 앉아 있어도 사유하지 않으면 공부 따로/욕망 따로가 되고 말지요. 공부한 걸 자주 사유하고 숙고해야 자기도 모르게 욕망의 구도가 바뀌게 된다고 하니, 의식적으로 ‘버려야 겠다’고 마음 먹을게 아니라 자신의 감정과 의식의 매커니즘을 더 캐묻고 들어가야 하겠어요.

(사유의 중지)
헌데 공부한 생각을 일으켜도 번뇌가 사라지지 않는 경우가 있잖아요. 이때는 ‘사유를 중지’하는 것도 한 방법이래요. 사유를 중지한다는건 번뇌를 일으킨 것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원인에 대한 중지’를 말하는 것이예요. 즉 ‘이건 저것 때문이야’하고 단선적인 인과를 만들려는 원인에 대한 사유를 중지하는 것이지요. 이 세계는 복잡한 연기조건 속에서 펼쳐지고 있는데 그중 하나의 선만을 끄집어내서 원인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은 그저 자기 머릿속의 논리일 뿐, 실제는 아니잖아요. 연기란 모든 것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난다는걸 이해하고, 그 인과를 따져 묻는 것만 하지 않아도 악하고 불건전한 생각이 더 진전되지 않을 수 있어요.

(독화살의 비유)
부처님의 유명한 독화살 비유도 이와 같은 원리예요. 독화살을 맞았을 때 내가 이걸 맞게 된 원인이 무어고, 누가 쐈으며, 어떤 재질이었고, 내가 대체 왜 맞아야 하는지 등등... 이런걸 묻는건 자신에게 정말 이로운 것이 뭔지 모르고 있는 것이예요. 정말 자신에게 이로운 일은 독화살을 당장 뽑아내는 거지요. 그래야 독이 퍼지는걸 막을 수 있잖아요.
마침 이번주에 괴로움을 부르는 작은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가만히 놓고 채운샘께서 알려주신대로 실천해보는 계기가 되었어요. 독화살을 맞은 직후에는 마음 속에서 화가 일어나 제가 평소의 습대로 인과를 짓고 있더라구요. 그러다 조금 더 지나 상대로 향했던 인식의 방향을 제 마음으로 돌려보니 퍼뜩 정신을 차리게 되었어요. 내가 또 멋대로 잘못된 인과를 짓고 있었구나! ‘나’를 인식 주체로 놓고 ‘저것 때문’이라고 원인을 따져 묻고싶어했구나..!
정말이지 괴로움을 해결할 수 있는건 내가 어디에 매여있는가를 보는 것밖에 없는거 같아요. 내가 슬픔에 빠져있다면, 어떻게 거기로부터 빠져나올 것인가. 그럼 그 매여있는 것을 깨야지요! 연기조건을 이해한다는건 내가 어떤 것에 집착하고 탐착하는지를 깨닫는거래요. ‘자신이 무엇에 매여있는지’ 그걸 묻지 않고서 해결보려고 하면 언제고 다시 비슷한 괴로움을 겪게되지 않겠어요?

(사유 수행)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자신이 매여있는 사유와는 다른 길을 내볼 수 있을까요? 물론 끊임없이 수행하는 길 밖에 없겠지요. 수행에도 여러 방법이 있지만, 채운샘은 그중에서도 ‘사유수思惟修(사유의 길을 내는 수행)’에 대해 말씀해주셨어요. 부처님께서도 신체적 수행과 언어적 수행과 정신적 수행 중 ‘정신적 수행’을 제일로 치셨던걸 보면 사유 수행이란 정말 근본적이고 중요한 수행인 것 같아요.
왜 공부하면서도 욕망은 크게 바뀌지 않는걸까요? 그건 “다른 욕망을 압도할 정도로 공부가 나를 지배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래요. 아무리 책을 많이 읽더래도 그 읽은 구절을 머릿속에 품고 나를 지배하게 하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란 말이지요. 의식으로 이해했다 해도 그게 나의 욕망이 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겠어요. 실로 뜨끔하고 긴장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만, 그럼서도 동시에 이 말에 담긴 힘이 느껴져 정말 실천해보고 싶은 마음이 일었어요. 공부의 힘을 키워 이 욕망들을 압도해보리라 하는 발심!

(뗏목의 비유)
수행에 대한 발심이 섰다면 이제 진리로 가는 뗏목에 단단히 올라서야 겠지요. <뱀에 대한 비유의 경(22)>에는 유명한 뗏목의 비유가 나와요. 진리에 가닿기 위해서는 진리로 날라줄 뗏목을 믿고, 함께 뗏목을 타는 도반들에 의지해서 가야한다고요. 중요한 것은 뗏목은 진리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예요. 어떤 법을 듣고 깨닫게 되었다면 그걸 통해 어떻게 살아가는가가 중요한거지 뗏목에 집착하고 기념비화할 필요는 없지요. 부처님은 뗏목이 ‘건너가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하세요. 무엇으로도 깨달을 수 있다고 해요. 그림을 그리면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신체 수련을 통해서도, 공부를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지요. 다만 이 중 어떤 한 뗏목만을 정답으로 삼는건 깨달음과 멀어지는 길이예요. 중요한건 뗏목에 의지하여 깨달음의 길로 가되, 뗏목을 실체화하지 않는 것이예요. 그래서 부처님은 저 언덕에 도달한 이후에는 뗏목을 잘 처리할 것을 당부하세요. 깨달았다면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아야 진정한 자유의 길이 열린다고 말이예요.

한주간 생각할 수 있는 화두거리를 던져준 참말 감사한 수업이었어요. 저는 그중에서도 제일 와닿았던 질문, ‘왜 나는 다른게 안 보이고 이게 보이는걸까?’ 하는 것을 큰 화두로 삼으며 한 주를 보내고 있어요. 평소에 제 욕망이 어디에 붙어 있었는지를 보면서 깜짝 놀라기도 하고요,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유의 길을 내어보려고 배운걸 적용해보는 연습도 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지금까지 한번도 제대로 사유의 길을 다르게 내보지 않았다는걸 절감해요. 막상 일이 닥치면 어찌나 쉽게 하던대로 해버리고 마는지. 새로 길을 낸다는건 정말 어려운 일인듯 해요. 그럼에도 꾸준히 사유하고 숙고하면 언젠가 이 공부도 마음의 경향이 될 수 있겠지요? 같이 공부하는 도반들과 함께 꼭 이번 생에 성불할 수 있기를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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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10-20 14:13
    인과가 아니라 조건을 사유한다... 가지고 있던 의문 중 하나가 지난 수업에서 조금 풀렸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아리까리합니다;; 되도 않게 머리로 이해하려니 더 안 되나 싶으니 저도 이응처럼 실전 연습을..! +_+ 위에 "의식이 형성되는 조건을 철저히 사유"해야 한다, "자기 감정과 의식의 메커니즘을 더 캐묻고 들어가야" 한다는 말을 되새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