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10.30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7-10-25 10:39
조회
2544
기억하기로, 그 자신의 유배지 생활을 바탕으로 쓴 소설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유형수들을 가장 고통스럽게 한 것 중 하나가 무의미한 노동의 되풀이라고 했습니다. 땅을 파라는 명령에 죄수들은 땅을 팝니다만, 일정 정도 땅을 판 뒤 내려진 명령은 그 땅을 다시 메우라는 것이었지요. 갇혀 있는 처지기는 했지만 돈으로 술담배를 밀수하는 것도 가능했던 수인들로 하여금 자신이 지금 형벌을 받고 있다는 자각을 가장 강하게 일깨운 것, 그것은 그런 헛된 노동의 되풀이였습니다. 정말 아-무 목적도 없이, 완성물에 대한 그 어떤 기대도 품는 게 불가능한 채 어떤 일을 한다는 것, 그것만큼 인간에게 자신의 무능함과 현실의 비참함을 일깨우는 게 없으니까요.

수업에서 채운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인 것 중 하나, 인간은 정말이지 목적론적 존재라는 사실. 중생은 탐착하지 않으면 못 산다!
이것을 하면 이러저러한 결과를 얻는다… 보장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의 희망이라도 있지 않고는 인간은 무언가를 그냥 하면서 살기가 참 어렵습니다. 선생님 말씀처럼, 식물과 다르니까요. 식물은 언어로 세상과 존재를 표상하지 않으니 자연법칙 안에 고스란히 합치된 삶을 살고 스러집니다. 하지만 고도의 추상화 능력을 견지한 인간종은 ‘A는 B다’를 시작으로 온갖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선악과 시비를 분별하면서 세계를 내 견해로 뒤덮습니다. 그러니 자연과 괴리된 채 살고 고통 받지요.

고로 고통을 소멸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이것입니다. 자연법칙, 즉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라는 진실을 무시한 채 내지 그에 무지한 채 수없는 분별지를 생산·재생산하는 일, 바로 그것을 중지해야 한답니다.
채운 선생님께서는 그래서 불교는 올바른 것을 해라, 선한 것을 해라, 결코 이런 걸 말하지 않는다고 하셨죠. 내가 지금 올바르다고 믿는 것, 바로 그것도 특정한 조건들 안에서 인연에 의해 일시적으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는 것, 바로 그것을 통찰하는 것이 관건이랍니다. 목적, 당위, 이것으로 점철된 삶, 그래서 한없이 경박해지고 또 무거워지는 삶을 변신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이것 같습니다.

문제는 그걸 어떻게 하느냐는 건데, 지난 수업 시간에 강조된 것은 바로 ‘이해하라!’ 자, 그러니 이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봐야겠죠.
스피노자의 주장을 가져와 채운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은 한 마디로 이렇습니다. 이해란, 느껴질 때까지 하는 것이다.
머리로 하는 것, 언어로 이렇게 저렇게 설명하고 설득할 수 있는 것, 이건 아직 이해한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색수상행식 중 어느 하나 독립적으로, 선험적으로 존재하고 운동하는 게 없으니까요. 식 작용이 행에 영향을 미치고, 또 행이 식에 영향을 미치는 식이지요. 오온의 작용 또한 연기 조건 안에 있는바, 하나가 달라지면 다른 것도 분명 달라진답니다.
그러니 어떤 것을 제대로 이해했다는 것은 기실 머리로 하는 이해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신체 변용의 방식의 변화와 대상을 감각하고 그에 반응하는 방식이 특정하게 변화했음을 의미합니다. 어떤 일, 어떤 사람에 대해 즉각적으로 내가 느끼는 좋음과 나쁨, 이게 달라졌다면 정말로 이해가 달라진 거지요.
내가 나를 드높이는 것을 추구하는가, 아니면 깨달음을 추구하는가. 내가 대중의 이해와 인정을 욕망하는가, 아니면 그런 것들에 대해 가볍고 편안해지길 욕망하는가. 전자와 후자는 세상과 자신에 대한 다른 이해 및 다른 느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자, 만약 무상과 무아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채운 선생님은 물론(^^;) 공부라고 하십니다. 더 정확히, 아니 보다 중요하게는, ‘함께’ 하는 공부.
선생님 말씀에 의하면 습관화되어야 비로소 이해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인데, 경험상 우리도 알지요. 어떤 습관 하나를 버리는 데에도 무지막지한 주의력, 자신에 대한 집중, 인내, 그리고 타인의 도움 등등이 필요합니다. 물리의 세계가 다 이렇지요. 구르는 공을 막으려면 그것에 맞먹는 힘이 다른 방향에서 들어와야 하고, 심지어 그 공을 다시 거꾸로 올리고자 한다면 그 힘보다 더 강한 힘을 들여야 합니다.
정말이지 관성은 무시무시합니다. 게다가 그게 한두 해도 아니고 40년, 50년 동안 이어져온 것이라면……! 바로 그 관성을 스톱시키고 방향 전환시키기 위해 요구되는 것, 그게 사유랍니다. 공부란 쥐어짜낼 수 있는 한 지력을 동원해 사유하는 것!

하지만 사유라는 게 어디 내 맘대로 된답니까? 독학자는 사유한다고 착각할 뿐 실은 자기 동일성을 확인하는 과정만 되풀이할 가능성이 높지요. 왜냐하면 사유의 출발점은 내 안이 아니라 외부니까요. 기존의 내 이해 방식, 내가 감각하고 느끼고 사유하는 방식에 균열을 일으키는 것은 동일자들이 아니라 타자들이니까요. 최소한, 외계가 없는 진공의 상태에서라면 나의 지향, 나의 앎 그 어떤 것도 만들어질 수 없고 확인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채운 선생님께서는 공동체가 깨달음의 조건이자 번뇌의 조건이라고 하셨어요. 내가 알지 못하는 내가 모습을 드러내는 곳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니까요. 내가 이해했는지 아닌지, 내 욕망이 무엇이고 무엇을 느끼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곳, 그곳은 모여서 공부하고 싸우고 웃는 공동체 안에서라는. “공동체는 나의 앎을 검증할 수 있는 장입니다.” 나를 일으켜 세우고 또 나를 극(克)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있음으로 하여 우리는 자신이 어떤 일, 어떤 사람, 어떤 사물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마음을 짓는지를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사유의 여지, 새로운 이해의 여지도 생겨나는 거고요.
요즘 부쩍 저 자신의 부정적인 면모를 많이 봅니다. 이전까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형편없어서 깜짝깜짝 놀라지요. 그걸 감정적으로만 처리하기보다(자학은 오만의 또 다른 형태!) 조금 더 덤덤하고 냉정하게 들여다보고 이해하고 싶어집니다. 그런 차원에서, 안 읽히는 것이나마 불교 경전을 읽고 있어 다행입니다 ^^;
다른 분들도 분명 그러시리라 믿어요. 채운 선생님께서 모두의 글이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고 하셨는데, 글에 힘이 붙는다는 건 삶에도 몸에도 힘이 붙는다는 뜻이겠지요. 타인의 칭찬으로 으쓱해지면 곤란하지만, 그래도 스승의 말씀을 마음 한편에 두고서 그것도 조건 삼아 성실하게 나가봅시다.

 

다음 시간에는 <맛지마니까야> 65~77경 읽고 만납니다. 과제는 ‘무아’와 ‘윤회’ 개념 정리. 나는 어떻게 윤회를 겪고 있는가, 이에 대해 생각해보라는 게 선생님의 주문이었습니다.

이번 주 후기는 은하 쌤, 잘 부탁드려요^^ 다음 주 간식은 은남 쌤과 아로리 쌤입니다.

자, 그럼 모두들 다음 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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